나는 의도적 훈련(deliberate practice)을 믿는다.
그러니까 요즘 논문이 뭐라고 하든 간에, 특정 기능을 "체계적"으로 훈련한다면 기존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건 기계적인 해석의 결과다. 나는 아주 많은 종류의 퍼포먼스가 변인의 세밀한 통제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변인과 성과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한다면, 사실 이해까지 가지 않더라도 단순한 가설 사고와 실험을 반복한다면 더 나아지리라고 믿는다.
이 믿음이 누구나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과 동치는 아니다. 세상에는 역치가 있다. 그 역치 미만의 존재들은 절삭되곤 한다. 설령 내가 어제의 나보다 나아졌다고 한들 역치를 넘지 못한다면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에는 가치가 있다. 총체적인 결과로써 의미를 생산하지 못했더라도 개선 그 자체가 희망으로 기능한다. 여기까지 동의했다면 남는 것은 하나뿐이다.
성실.
끈기, 근성, grit, self-discipline, consistency, 어떤 이름이건 간에 계속해서 누적해나가는 힘 그 자체. 성실이야말로 가장 근간에 있다. 성장의 문제는 충분한 방법론이 전제될 경우 성실의 문제로 환원된다.
어떻게 성실할 수 있을까? 나는 오랜기간 그 화두에 대해 생각해왔다. 해답은 건강과 적절한 시간 관리법인 듯하다. 너무 간단한 것 아니냐고? 나도 그럴 줄 몰랐다. 뭔가 대단한 해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건강이라는 건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모두 포함한다. 육체적 건강은 실천이 어렵고 정신적 건강은 방법이 어렵다. 소진되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항상성을 말한다. 나를 여전히 나로 있게 만드는 것. 나를 여전한 나로 되돌리는 것. 사람은 자신만의 "낙원"을 구축해야만 한다. 말이 낙원이지 자신을 둘러싼 일종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이다. 내재된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은 자신 혼자서 해낼 수 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회복탄력성을 이곳저곳에서 끌어와야 한다. 명상이라는 방법일 수도 있고, 취미나 특기일 수도 있고, 친구나 연인이나 가족일 수도 있으며, 육체적 건강 자체가 기둥이 되어주기도 한다.
다시 돌아와서, 성장은 방향과 지속성의 문제다. 방향은 가설 사고와 실험을 통해 얻어내면 된다. 지속성을 가져야만 한다. 사실 방향은 외부에서 주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지속성은 절대로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쟁취해내야만 한다. 그것이 어렵다.
오늘 불현듯 내가 능동적인 선택을 하기보다 수동적으로 남은 선택지를 기다려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해야 할까. 손실을 명확화하는 것을 싫어한 셈이다. 마치 주식 계좌에 찍힌 마이너스를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투자자처럼. 트레이드오프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다만 비용을 치를 줄 알아야겠지.
성실해지고 싶다. 외압 없이도 나 혼자 오롯이. 방법은 안다고 생각한다. 실천뿐이다, 언제나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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