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핑계다.
요즘 블로그 포스팅이 밀리고 있다. 시간은 없고, 쓸 것은 많고. 임시저장한 포스팅이 늘어만 가는 중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완벽주의 때문이라고 하면 전면적으로 부정은 못하겠는데, 일단은 LLM이 도래한 시대에 단순한 지식 나열 따위의 기록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커서다. 나만 보든지 남에게 보여주든지 간에 LLM이나 다른 블로그의 포스팅이 제공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던 것.
그러면 포스팅된 글들이 그 가치를 달성하고 있느냐? 그건 또 아니긴 한데. 하여간 내 내면의 기준을 만족하고 싶은 아집이다. 단순히 기록만 할 거라면 트위터나 Notion을 썼을 것이다. 굳이 블로그라는 지면을 선택한 것은 어떤 기준을 만족하고자 하는 내 성질을 이용해서 보다 괜찮은 기록을 만들어내고자 함이었다.
기록. 기억은 휘발되지만 기록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기록은 기억에 비하면 영속적이다. 기록만으로 의미가 있지 않나요? 아니. 개인적인 경험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내가 어떠한 사실보다 내 사고나 이론에 대해 자주 생각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중언부언이 중구난방이 되는 꼴을 많이 경험했다. 지금도 내 Notion 문서에는 중복되는 내용의 문서들이 넘쳐난다. 재구성에 실패한 흔적들.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글쓰기 방법론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대단치는 않고 별다른 비밀도 아니다. 그저 여러 글을 병렬로 진행하는 것이다.
우선 뼈대만을 생각한다. 그것은 좋은 도입부일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결말일 수도 있다. 꼭 써먹고 싶은 유머나 비유일 때도 있다.
그로부터 필요한 것을 역산한다. 도입부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을, 결말을 위해서 있어야만 하는 과정을, 유머와 비유를 사용하기에 적절한 맥락을.
그러나 그것들을 한 번에 떠올리고 단번에 해내기는 정말로 지난해서, 나는 수없이 글의 완성을 미뤄왔다. 그러다가 다른 글을 바라보다 미루고, 다시 원래 글을 들여다보고 손을 대다가 또 다시 미루고. 그런데 웬걸, 그러다 보니까 어느 날 갑자기 괜찮은 아이디어가 내려오는 것 아닌가.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나는 그것을 '뇌 속의 블랙박스'가 해내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무의식 속의 연산장치가 적절한 입력을 곱씹다가 어느 순간 퉤, 하고 출력을 뱉어주는 것이다. 고맙게도. 하지만 그 출력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씨앗에 물을 줄 뿐이다. 씨앗은 언젠가 언제고 자라서… 짜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글이 된다.
이 과정에 의미가 있냐고 하면, 글쎄, 그냥 자기만족뿐 아닐까? 오랜 기간 그러면서 내가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게 대단한 능력이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아니지만, 나는 만족스럽다.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닥친 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근시안적인 나날이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드디어 뭔가를 지속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러한 "농사"에는 단점이 있다. 내 흥미를 지속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압력을 주어 단기간에 해내야만 하는 일에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것. 그러니까 핑계다. "저는 이런 식으로 글을 쓰니까 포스팅이 느립니다 ㅎㅎ ㅈㅅ;"
그래도 씨앗에 물을 주고 있다. 글쓰기가 아닌 분야에서도. 적절한 싹이 틀까? 모르겠다. 최대한 많이 심고 꾸준히 물을 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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